폐현수막에 피어난 시흥

도시의 말에서 출발한 공연
시흥 거리 곳곳에서 정보를 전한 뒤 철거되는 폐현수막이 음악과 미술을 만나 새로운 작품으로 바뀌었다. 시흥에서 음악 활동을 이어가는 시흥시 문화홍보대사 문화예술단체 ‘요’는 현수막이 역할을 마친 뒤 어디로 가는지에 주목해 2026년 공연 <걸린말들>을 기획했다.
<걸린말들>은 거리에서 수거한 현수막을 창작 재료로 활용한 공연이다. 시흥의 지역과 사람, 감정과 소리에서 영감을 받은 전자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작가가 현수막 위에 그림을 완성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미 쓰임을 다한 현수막의 글과 이미지 위에 새로운 색과 형태가 겹쳐지면서 음악과 회화가 한 장면 안에서 이어졌다.
도시의 정보를 전달하던 현수막은 버려지는 데서 끝나지 않고 공연의 무대와 미술작품으로 다시 사용됐다. 공연은 폐현수막의 변화 과정을 시민들이 현장에서 함께 지켜볼 수 있도록 구성됐다.
은계호수공원에서 시작된 변화
첫 공연은 2026년 10월 3일 은계호수공원에서 열렸다. 시민들이 오가는 야외 공간에 전자음악이 울려 퍼졌고, 시흥에서 활동하는 일조 작가는 아크릴 물감을 이용한 라이브 페인팅을 선보였다. 거리에서 수거된 현수막 위에는 음악의 흐름에 따라 여러 색이 차례로 더해졌다.
일조 작가는 특정한 사물이나 형태를 명확하게 그리기보다 관람하는 사람의 시선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색채를 겹겹이 쌓는 방법을 선택했다. 기존 현수막에 담긴 정보가 사람에 따라 친절한 안내로 다가오기도 하고 강한 메시지로 느껴지기도 한다는 점에 주목한 작업이었다.
작가는 넘쳐나는 정보를 어떤 태도로 바라봐야 하는지 질문하며 ‘요’의 음악과 소리를 따라 작업을 전개했다. 개인의 경험이 음악과 페인팅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고, 다시 새로운 경험으로 넓어지는 과정도 작품에 담고자 했다. 현수막 위에는 한 인물이 무언가를 바라보는 장면이 더해졌다.
은계호수공원을 오가던 시민들은 잠시 걸음을 늦추고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작업이 진행될수록 기존의 글자 위로 색과 선이 쌓였고, 관람객들은 평범한 폐현수막이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되는 모습을 지켜봤다. 야외 공간의 일상적인 풍경과 실시간 창작 과정이 자연스럽게 맞물렸다.
늠내홀에서 넓어진 무대
두 번째 공연은 2026년 10월 10일 시흥시청 늠내홀에서 이어졌다. 실내 공연에서는 ‘요’의 전자음악과 라이브 페인팅에 미디어아트가 더해졌다. 관람객들은 음악과 영상, 회화 작업이 동시에 진행되는 무대를 한자리에서 감상했다.
늠내홀의 라이브 페인팅에는 최동원 작가가 참여했다. 최 작가는 제한된 공연 시간 안에서 다양한 시각적 층위를 보여주는 데 집중했다. 음악이 만드는 박동과 긴장감 속에서 현수막 위에 이미지가 더해졌고, 서로 다른 표현 수단이 하나의 공연으로 연결됐다.
최 작가는 현수막을 특정 공간에 걸렸다가 사라지는 표면의 언어로 바라봤다. 음악은 귀를 지나 마음에 울림을 남기는 언어로, 라이브 페인팅은 그 경험을 밖으로 드러내는 표현의 언어로 접근했다. 공연장에서 소리와 이미지가 함께 쌓이는 동안 현수막의 기존 문구와 새롭게 그려진 형상이 여러 겹으로 포개졌다.
작품의 중심에는 현수막이 지닌 시간성이 놓였다. 최 작가는 오래된 현수막 사이로 풀이 자라는 모습에서 받은 인상을 바탕으로 시간이 축적되는 과정을 화면에 담았다. 한때 거리에 걸렸던 문구가 사라지더라도 그 자리에 남은 흔적은 다시 감각할 수 있는 재료가 된다는 관점이었다.
은계호수공원의 야외 공연이 시민의 일상 속에서 그림의 탄생을 보여줬다면, 늠내홀 공연은 음악과 영상까지 더해 폐현수막이 변화하는 과정을 입체적으로 펼쳐 보였다.
시흥 곳곳에 걸렸던 말들
공연을 기획한 ‘요’는 도시 곳곳에 흩어진 말의 조각을 다시 찾아보는 데 초점을 맞췄다. 현수막의 문구가 어디에서 만들어지고 어떤 과정을 거쳐 거리로 나오는지 살펴보며, 도시가 다양한 정보를 통해 시민에게 계속 말을 건네고 있다는 점을 공연에 담았다.
평소에는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문장도 누군가에게 필요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일정 기간 자리를 지킨다. 이후 현수막이 철거되고 사라지는 과정 역시 도시가 말을 만들고 사용한 뒤 정리하는 흐름에 포함된다. <걸린말들>은 그렇게 흩어지고 사라지는 문구를 한자리에 모아 음악과 그림의 대상으로 다시 바라본 작업이다.
공연에 사용된 곡은 시흥의 장소와 사람, 감정과 소리에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지역의 이야기가 음악으로 흐르는 동안 시흥 거리에서 실제로 역할을 마친 현수막이 회화 작품으로 변했다. 공연의 소재와 음악이 모두 시흥이라는 지역을 중심으로 연결된 셈이다.
하나의 그림이 여러 작품으로
라이브 페인팅이 끝난 뒤에는 완성된 작품을 시민들과 나누는 순서가 진행됐다. 시민들은 대형 현수막 그림에서 마음에 드는 부분을 직접 골랐다. 선택한 부분은 리플렛 액자 크기에 맞춰 오려 작은 작품으로 담겼다.
한 장의 커다란 그림은 시민의 선택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나뉘었다. 누군가는 강한 색이 겹친 부분을 골랐고, 다른 시민은 선이나 형태가 두드러진 장면을 선택했다. 같은 현수막에서 나온 조각이지만 각 작품에 담긴 화면은 모두 달랐다.
현장에서는 시민들이 작품을 자세히 살피며 자신이 간직할 부분을 고르는 모습이 이어졌다. 음악을 들으며 완성 과정을 지켜본 그림의 일부는 작은 액자에 담겼고, 공연장에서 만들어진 기억과 함께 시민들의 일상으로 옮겨갔다.
거리에서 정보를 전달했던 현수막은 공연의 재료가 됐고, 공연이 끝난 뒤에는 시민이 소장하는 작은 미술작품으로 다시 쓰였다. 하나의 폐현수막이 음악과 라이브 페인팅을 거쳐 여러 사람의 서로 다른 장면으로 나뉘는 과정까지가 <걸린말들>의 전체 구성을 이뤘다.
음악과 미술로 이어진 지역 이야기
<걸린말들>은 2026년 10월 3일 은계호수공원과 10월 10일 시흥시청 늠내홀에서 각각 다른 형식으로 펼쳐졌다. 은계호수공원에서는 일조 작가의 아크릴 라이브 페인팅이 시민들의 이동과 맞닿았고, 늠내홀에서는 최동원 작가의 작업에 ‘요’의 미디어아트가 더해졌다.
두 공연은 장소와 참여 작가가 달랐지만 폐현수막, 시흥의 음악, 현장에서 완성되는 그림이라는 공통된 흐름을 유지했다. 관람객은 이미 인쇄돼 있던 문구와 이미지가 새로운 색에 덮이거나 한 화면 안에서 다시 조합되는 과정을 지켜봤다.
공연이 끝난 뒤 작품을 시민들과 나눈 과정은 무대에서 시작된 창작을 생활 공간으로 이어갔다. 거리의 현수막에서 출발한 재료가 공연장을 거쳐 작은 액자 속 작품으로 바뀌면서 <걸린말들>은 시흥의 말과 소리, 이미지가 이동하는 과정을 보여줬다.
